일제 식민 통치 35년 (1910~1945)
일본은 35년 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통치했다. 시기마다 통치 방식이 달랐다 — 1910년대 무단 통치, 1920년대 문화 통치,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 일제 식민 통치 3시기
무단 통치
총독부가 군대처럼 통치. 헌병이 경찰을 겸함. 교사도 칼을 차고 수업.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농민의 토지를 약탈.
문화 통치 (기만)
3·1 운동 충격으로 정책 변화. 겉으로는 신문 허용·교육 확대. 실제로는 검열 강화·친일파 양성·분열 통치. 산미증식계획(1920~34)으로 쌀 약탈.
민족 말살 통치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 황국신민서사·창씨개명·신사참배·한국어 금지·강제 징용·일본군 위안부·학도병.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한 것이 한 사람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일본의 동양 침략 정책이 동양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이며, 한·일·청 3국이 평등하게 협력하는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이러한 구상을 『동양평화론』으로 쓰다가 사형이 집행되어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미완)과 뤼순 법정 진술의 요지 (1910)토지조사사업의 폭력성
일제는 1910~18년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표면적 명분은 "근대적 토지 등기"였지만, 실제 효과는 한국 농민의 토지 약탈이었다. 농민들은 한문으로 된 신고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한 안에 신고하지 못해 토지를 빼앗겼다. 또 대한제국 황실·관청 소유 토지가 모두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빼앗은 토지의 상당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고, 한국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 약 100만 명이 만주·일본으로 이주.
3·1 운동 (1919) — 200만의 함성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학생·시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한 달 만에 전국 200만이 거리로.
📜 3·1 운동의 전개
1919년 3월 1일 — 민족 대표 33인 명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 최남선 작 · 손병희 등 33인 서명 (1919.3.1)"한국 현대사의 출발점"
3·1 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의는 여러 층위가 있다.
①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 — 200만 참여, 2,000여 곳 시위, 종교·계층·지역을 넘어선 연대.
② 임시정부 수립의 모태 — 1919.4.11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한반도 역사상 첫 민주공화국.
③ 일제 통치 정책 변화 — 1910년대 무단 통치 → 1920년대 문화 통치(기만적이지만).
④ 세계사 속의 사건 —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식민지 곳곳에서 저항이 터져 나왔다. 3·1 운동은 그 흐름에서 가장 이른 대규모 운동이었고, 중국 5·4 운동(1919.5.4)에 직접 자극을 주었다. → 아래 SECTION 03에서 자세히.
⑤ 대한민국 헌법의 출발 —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 곧 3·1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법적·정치적 정통성의 기원.
유관순 — 17세의 순국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 출생. 이화학당 학생.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 학교가 일제에 의해 휴교되자 고향(아우내)으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 부모님이 일본 헌병의 발포로 그 자리에서 사망. 본인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외쳤다. 1920년 9월 28일, 17세에 옥사. 유관순의 이름은 한국에서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사 속의 3·1 운동 — 1919년, 식민지들이 함께 흔들렸다
3·1 운동은 한반도만의 사건이 아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한 해 동안 조선·중국·인도·이집트·베트남에서 식민 지배에 맞선 움직임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왜 하필 같은 해였을까?
🌏 1919년, 여섯 달의 세계 지도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리·도쿄·서울·카이로·암리차르·베이징에서 잇달아 터진 순서.
민족자결주의의 그늘 — 왜 우리 요구는 다뤄지지 않았나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은 실제로는 패전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땅에 주로 적용되었다.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의 안건이 되지 못했고, 김규식이 낸 독립 청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청원도, 이집트 대표단의 파리행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기대와 배신이 1919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회의장에서 길이 막히자, 사람들은 거리에서 스스로 답을 만들기 시작했다. 3·1 운동도, 5·4 운동도, 암리차르의 군중도 그 답이었다.
3·1 운동은 세계에 어떤 자리를 차지할까
확실한 것 — 3·1 운동은 1919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대규모 반식민 운동이었고, 상하이·베이징의 지식인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중국 5·4 운동에 자극을 준 것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조심할 것 — 인도·이집트·베트남의 움직임까지 3·1 운동이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같은 조건(1차 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의 기대)에서 거의 동시에 터진 흐름이고, 3·1 운동은 그 흐름의 첫 신호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남는 것 — 3·1 운동을 세계사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우리만의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20세기 식민지 해방이라는 큰 흐름의 출발선 가운데 하나다.
✍️ 탐구 — 1919년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자
위 연표에서 사건 두 가지를 골라, 그 둘의 공통점 하나와 차이점 하나를 근거(연도·인물·장소)를 들어 써 보자. 정해진 정답은 없다. 스스로 채점하지 않아도 된다.
25년의 독립 운동 — 무장 투쟁·외교 활동·의열 활동
3·1 운동 후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다. 만주의 무장 투쟁,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의열단·한인애국단의 의열 활동, 그리고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
⚔️ 독립 운동의 여러 갈래
⚔️ 무장 독립 투쟁
1920 봉오동 전투(홍범도)·청산리 대첩(김좌진)·한국독립군(지청천)·조선혁명군(양세봉). 1940 한국광복군(임시정부 산하). 1945년 미국과 공동작전(독수리 작전) 직전 광복.
📜 외교 독립 활동
임시정부의 파리 강화 회의 활동(김규식)·미국 워싱턴 군축 회의·이승만의 미국 활동. 1943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 보장" 명문화.
💣 의열 활동
의열단(김원봉·1919): 김상옥(종로경찰서)·나석주(동척)·김지섭(도쿄). 한인애국단(김구·1931): 이봉창(1932 도쿄 천황 폭탄)·윤봉길(1932 상하이 홍커우).
📚 실력 양성·문화 활동
물산장려운동(1920)·민립대학설립운동(1923)·광주학생항일운동(1929)·조선어학회(1929~) 한글 보급. 이육사·윤동주·심훈 등 문학 저항.
한국 독립 운동의 4대 영웅
안중근(1909) —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동양 평화론.
이봉창(1932.1.8) —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본 천황 마차에 폭탄.
윤봉길(1932.4.29) —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점령 축하식에 도시락 폭탄 → 시라카와 대장 등 사살. 장제스가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 청년 한 사람이 해냈다"고 평. 이 사건이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를 공식 지원하는 계기.
유관순(1920) — 17세에 옥사. 한국 여성 독립 운동의 상징.
1945년 8월 15일 — 광복, 그리고 분단
35년 만의 광복.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분단의 시작이었다.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소 군정 통치가 시작된다.
🌅 광복과 분단의 흐름
왜 광복은 우리에게 분단을 가져왔을까?
한국이 35년 만에 광복을 맞은 것은 외부 요인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한국광복군이 일본과 직접 전투할 기회를 갖기 직전(독수리 작전), 일본이 원폭과 소련 참전으로 무조건 항복한 것. 그래서 광복의 성격을 두고 "우리 손으로 일제를 몰아낸 것이 아니라 외부 힘으로 풀려난 것"이라는 견해와,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준비와 임시정부의 끈질긴 외교(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 등)가 광복의 국제적 정당성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는 견해가 함께 있다. 그래서 광복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말렸고 — 결국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광복은 빛이었지만, 그 빛 뒤에는 그림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참 / 거짓 — 8문제
🇰🇷 국권 피탈과 극복 참·거짓 8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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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로 정리하면
핵심 정리
-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 → 35년 식민 통치. 시기별로 무단(1910s)→문화 통치(1920s)→민족 말살(1930~45). 토지조사·산미증식·창씨개명·강제 징용·위안부.
- 1919.3.1 만세 운동: 200만 참여, 2,000여 곳. 독립선언서·유관순. 4.11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 한반도 첫 공화국.
- 세계사 속 1919년: 1차 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기대 → 파리 강화 회의(1.18)에서 좌절 → 서울 3·1(3.1)·이집트(3.8)·인도 하르탈(4.6)·중국 5·4(5.4)·베트남 청원(6.18). 3·1은 그 흐름의 첫 신호였고 5·4에 자극을 주었다.
- 독립 운동 4갈래: 무장 투쟁(봉오동·청산리·광복군) + 외교(임시정부) + 의열(안중근·이봉창·윤봉길) + 실력 양성(조선어학회·문학).
- 1909 안중근 의거(이토 사살). 1932 이봉창(사쿠라다몬)·윤봉길(홍커우) — 한인애국단(김구).
- 1945.8.15 광복(원폭·소련 참전) → 카이로 회담의 약속 실현. 그러나 38선 분할 점령 → 1948 남북 분단의 비극.